12 종교의 법칙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298)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신념체계일 때, 인간의 규범과 가치는 동물, 식물, 요정, 유령 등 다양한 존재들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이런 종교는 세계관이 매우 국지적이었고, 특정 장소나 기후현상이 지닌 독특한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먼 곳의 다른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300)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는 질서에 대해 협의했다. 농부는 달랐다. 이들은 동식물을 소유하고 조작했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린 것이다.(301)
서구인들은 2천 년 동안 일신교의 세뇌를 받은 탓에 다신교를 무지하고 유치한 우상숭배로 보게 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고정관념이다.(303)
일신교와 구별되는 다신교의 근본적 통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나 근심 걱정에 개의치 않는다. ~
우주 최고 권력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이유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다 끌어안고 패배나 가난, 질병, 죽음까지도 끌어안기 위해서일 것이다.(304)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쉽다.~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305)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 악마, 다신론적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는다.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례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 종교일지 모른다.(317)
고타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개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320)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한 가지 법칙으로 요약해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오나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법(Dharma)으로 알려진 이 법칙은 불교도에게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다.(322)
근대는 강력한 종교적 열정의 시대, 전대미문의 포교 노력과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대였다. 수많은 자연법칙 종교가 근대에 새로이 등장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이들은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만일 종교를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산주의는 이슬람교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종교다.(324)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인본주의는 '인간성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엔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임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성시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328)~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다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업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329)
나치는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자체가, 네안데르탈인 같은 '하등한' 집단은 멸종한 데 반해 고대 인류 중 '우월한'집단은 진화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집단은 애초에 서로 다른 종족에 불과했지만 , 각자의 진화 경로를 따라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330)
사피엔스(2015), 유발 하라리,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