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누이 설화는 ‘옛날 어느 부부가 부자로 아들을 놓고 살았는데 딸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들은 있는데 딸은 없다는 사실이다. 아들만 있다는 것은 남성성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중 각편의 아들수로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 하는 3은 기록문학이나 구비문학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로 이때 3은 단순히 수사(數詞)의 의미보다는 ‘크다’, ‘많다’, ‘빈번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동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들이 3~9명까지 있었다는 것은 남성위주의 집단적인 의식이 지나침을 알 수 있다.
또 3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이루기에 ‘알맞은’ ‘적당한’ 이란 의미를 갖는데, 여우누이 설화는 도입부부터 이미 아들이 셋(3)이라는 사실과 기와집에 살고 있으며 소나 말을 많이 키운다는 사실까지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공고히 유지되고 있음을 강조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딸이 없다는 것은 여성성의 결여를 말한다. 여성성의 결여는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여성성을 강력히 억압함으로써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러 아들을 키우는 부부는 서낭님, 삼시랑, 산신령께 딸을 낳게 해달라는 치성(致誠)을 드린다. 그 결과 미움을 사 구미호, 삼미호, 불여우, 백여우, 여우와 같은 딸을 얻게 된다. 여기서 서낭님, 삼시랑, 산신령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대지이자 생명을 잉태하고 죽음을 포용하는 절대자와 같은 존재로 한국의 전통적인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다. 구미호, 삼미호, 불여우, 백여우, 여우는 악(惡)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미호, 삼미호, 불여우, 백여우, 여우의 출생은 벌을 내려 과욕을 응징하기 위한 시작이며, 지나친 남성성의 강조로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 말과 소가 죽는 시기가 딸이 난 다음부터 밤마다 일어난다는 점은 아니마의 부정적인 면은 태어나면서 무의식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자립적인 존재로 성장하지 못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우누이가 말과 소의 간을 먹는 행위는 귀토설화에서 용왕의 딸이 토끼의 간을 먹어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로 봤을 때 여우누이에게 간은 단순히 먹거리를 넘어 건강과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영약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정적인 여성성을 팽창시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이다.
말과 소가 많을 정도로 부자였던 집안은 여우누이의 출생과 동시에 말과 소뿐만이 아니라 부모, 오빠들까지 심지어는 동네의 흔적까지도 없어질 정도로 불모지(不毛地)가 된다. 이는 부정적인 여성성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말과 소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신체적인 건강의 손상뿐만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파멸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쓰러져 가는 집 한 채’를 남겨두었다는 것은 부정적인 여성성으로 인해 자아의 정신 상태가 피폐화되었음을 극대화시킨다.
무의식속의 부정적인 여성성이 팽창되면서 의식적인 자아인 오빠는 살기위해서 누이동생이 말과 소의 간(창자)를 빼먹어 말과 소가 죽는다고 알렸다. 그 댓가로 위로받고 보호받기는커녕 ‘뉘 하나 있는 걸 못 죽여서 허튼소리 한다는 욕지꺼리와 내쫓기는’상황에 처하게 된다.
오빠가 집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행위는 의식적인 자각을 갖게 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전처럼 부모라는 보호막속에서 안정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부모로부터 자립을 추구할 것인가를 내적으로 고민하는 전환점인 것이다.
기존과 같은 안정을 원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에 자리한 부정적인 여성상을 치유하지 못하고 아이 같은 어른 또는 어른 같은 아이로 퇴보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부모로부터 자립 추구한다는 것은 시야의 확장과 내면 탐구를 통해 성장하겠다는 자기선언이다.
이런 계기를 준 곳은 용궁 또는 이계(異界)로 용궁과 같은 이계(異界)는 오빠 내면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바른 모습의 아니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바른 모습의 아니마와의 만남은 곧 이전의 삶과의 단절이며,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이 된다.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장과정의 오빠는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아니마의 부정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색시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시야확장과 내면탐구를 통해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립적인 존재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도 자신만의 개성이 있는 존재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빠의 성장과정은 집에서 쫓겨 나기전의 모습과 집에 다녀오기를 결심하는 모습 그리고 나중에 나올 여우누이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에서 확인된다. 집에서 쫓겨나기 전 부모의 말을 듣고 마굿간이나 외양간을 지키는 오빠의 모습, 내쫓김을 당하는 모습은 분명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자신의 판단을 따르기 보다는 주어진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이며, 무기력하게 내쫓김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집에 다녀오려는 모습에서 아내와 벌이는 실랑이 과정이나 집에 돌아갔는데 자신을 위협하는 여우누이를 회피하는 장면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는 태도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오빠의 모습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믿고 의식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으로 수동적인 자세와는 다른 수용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오빠가 집으로 다녀오기를 결심하자 색시는 옛상처를 치유하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오빠만의 무기, 조력물을 주면서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때 조력물로 주는 것이 병이다. 병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태모의 자궁이며, 풍요와 자비를 나타내는 어머니의 포용의 원리를 나타내고,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모든 것을 창조해내는 마술적인 병이고, 치유의 병이고, 우주의 병이다. 즉 창조적인 모성이고 남성의 무의식적인 여성상, 아니마의 원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빠는 마음 든든한 조력물인 병을 갖고 옛 집에 간다. 옛 집에는 부모나 형제는 온데간데 없고 동네는 쑥대밭이 되었다. 정체없이 헤맸던 것이 내면 탐구를 시작해서 자아를 짓누르며 무의식속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여성성을 아는 것이었다면 옛 집에 간 것은 극대화된 부정적인 여성성과 대결을 벌이는 자아의 본격적인 싸움이다.
과거의 자아를 짓누르던 부정적인 여성성을 마주한 순간 옛 상처가 엄습해온다. 오빠는 부정적인 여성성의 위험성을 알고 옛 집에서 도망친다. 도망치는 오빠가 이전과 달라짐을 눈치 챈 여우누이는 자립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쫓아간다. 이때 오빠는 말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여성성의 그림자에서 탈피하자 오빠는 신체적인 건강을 되찾았다. 오빠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부정적인 여성성을 창조와 치유의 원형인 조력물을 이용하여 오빠의 내면으로부터 완전히 제거시키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두루 갖춘 자립적인 인격이 형성된 존재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