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의 활용과 동화의 긍정적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전래동화'라는 용어이다. 이용어의 부적합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제기되었으나 아동문학출판계나 아동문학계, 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1) 교육의 힘인지 집단적 신념의 힘인지는 알수 없으나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용어이다.(20)

1) 옛이야기의 지칭과 관련하여 각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용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용어 사용안함 옛날이야기 전래동화 옛이야기 (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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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오(2019), 옛이야기의 활용과 새로운 가능성 옛이야기와 동화의 아름다운 이별과 재회를 위해,아동청소년문학연구(25), 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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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은유적 의사소통 수단으로써 활용된 경우. 옛이야기 역시 여타의 문학 갈래처럼 작 작품마다의 주제가 있다. 그래서 현실적 상황에 부합하는 옛이야기를 얘기해줌으로써, 특정의 현실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12) 은유적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둘째, 옛이야기의 모티프가 고전소설에 활용된 경우. 옛이야기의 모티(13)프가 고전소설에 수용된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옛이야기의 활용 및 고전 소설의 형성이라는 양면에서 주목할 만한다. 고전소설은 그 형성 과정에서 옛이야기의 모티프, 서사구조 등을 가져왔지만 거기에 갈래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옛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 서사로써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다.(16)

~옛이야기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활용은 현재 여러 분야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예컨대, 첫 번째(18)로 살핀 경우와 유사한 예를 옛이야기를 활용한 자기서사 진단, 옛이야기(동화 포함)을 활용한 상담, 옛이야기를 활용한 다문화교육, 옛이야기를 활용한 언어교육1)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옛이야기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삼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간파된다. 두번째로 살핀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이야기는 고전소설의 형성과정에서 모티프 단위이건 각편 단위이건 어떤 식으로건 활용되면서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서 옛이야기는 옛이야기대로, 고전소설은 고전소설대로 각자의 갈래적 특성을 유지하여 왔다. 옛이야기와 고전소설은 매우 닮았으면서도 다소 다른 지점에 위치하여 있는, 소위 경쟁하는 형제(rival sibling)였다고 할 수 있다.(19)

그런데 옛이야기의 이러한 활용 양상은 근현대에 이르면서 더 다양한 서사 갈래들이 생겨나고, 또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가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애니메이션, 오페라, 웹툰 등으로 다변화됨에 따라 활용의 범위가 더욱 광범위해지며 복잡해지고 있다. 몇 작품은 예외이지만, 고전소설에서 파악되는 옛이야기의 활용이 비교적 단순했다면 지금 이 시대의 몇몇 분야에서의 옛이야기 활용은 대단히 창의적으로 이뤄지고 있다.옛이야기의 단순한 활용을 넘어서고 있으므로, 그 지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20)

최원오(2019), 옛이야기의 활용과 새로운 가능성 옛이야기와 동화의 아름다운 이별과 재회를 위해,아동청소년문학연구(25), 7-60

 

1)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Eric K. Taylor, Using Folktales, Cambrige University Press, 2000. 한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스토리텔링. 이야기활동  전래동화와  언어교육(이희숙, 엄해영, 이노경 역, 한국문화사, 2007) 최근의 한국 초등국어교과서에서 옛이야기를 다루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그러다보니 제재로 수록한 옛이야기의 내용이나 맥락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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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누이 설화는 옛날 어느 부부가 부자로 아들을 놓고 살았는데 딸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들은 있는데 딸은 없다는 사실이다. 아들만 있다는 것은 남성성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중 각편의 아들수로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 하는 3은 기록문학이나 구비문학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로 이때 3은 단순히 수사(數詞)의 의미보다는 크다’, ‘많다’, ‘빈번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동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들이 3~9명까지 있었다는 것은 남성위주의 집단적인 의식이 지나침을 알 수 있다.

3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이루기에 알맞은’ ‘적당한이란 의미를 갖는데, 여우누이 설화는 도입부부터 이미 아들이 셋(3)이라는 사실과 기와집에 살고 있으며 소나 말을 많이 키운다는 사실까지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공고히 유지되고 있음을 강조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딸이 없다는 것은 여성성의 결여를 말한다. 여성성의 결여는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여성성을 강력히 억압함으로써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러 아들을 키우는 부부는 서낭님, 삼시랑, 산신령께 딸을 낳게 해달라는 치성(致誠)을 드린다. 그 결과 미움을 사 구미호, 삼미호, 불여우, 백여우, 여우와 같은 딸을 얻게 된다. 여기서 서낭님, 삼시랑, 산신령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대지이자 생명을 잉태하고 죽음을 포용하는 절대자와 같은 존재로 한국의 전통적인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다. 구미호, 삼미호, 불여우, 백여우, 여우는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미호, 삼미호, 불여우, 백여우, 여우의 출생은 벌을 내려 과욕을 응징하기 위한 시작이며, 지나친 남성성의 강조로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한다.

, 말과 소가 죽는 시기가 딸이 난 다음부터 밤마다 일어난다는 점은 아니마의 부정적인 면은 태어나면서 무의식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자립적인 존재로 성장하지 못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우누이가 말과 소의 간을 먹는 행위는 귀토설화에서 용왕의 딸이 토끼의 간을 먹어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로 봤을 때 여우누이에게 간은 단순히 먹거리를 넘어 건강과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영약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정적인 여성성을 팽창시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이다.

말과 소가 많을 정도로 부자였던 집안은 여우누이의 출생과 동시에 말과 소뿐만이 아니라 부모, 오빠들까지 심지어는 동네의 흔적까지도 없어질 정도로 불모지(不毛地)가 된다. 이는 부정적인 여성성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말과 소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신체적인 건강의 손상뿐만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파멸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쓰러져 가는 집 한 채를 남겨두었다는 것은 부정적인 여성성으로 인해 자아의 정신 상태가 피폐화되었음을 극대화시킨다.

무의식속의 부정적인 여성성이 팽창되면서 의식적인 자아인 오빠는 살기위해서 누이동생이 말과 소의 간(창자)를 빼먹어 말과 소가 죽는다고 알렸다. 그 댓가로 위로받고 보호받기는커녕 뉘 하나 있는 걸 못 죽여서 허튼소리 한다는 욕지꺼리와 내쫓기는상황에 처하게 된다.

오빠가 집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행위는 의식적인 자각을 갖게 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전처럼 부모라는 보호막속에서 안정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부모로부터 자립을 추구할 것인가를 내적으로 고민하는 전환점인 것이다.

기존과 같은 안정을 원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에 자리한 부정적인 여성상을 치유하지 못하고 아이 같은 어른 또는 어른 같은 아이로 퇴보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부모로부터 자립 추구한다는 것은 시야의 확장과 내면 탐구를 통해 성장하겠다는 자기선언이다.

이런 계기를 준 곳은 용궁 또는 이계(異界)로 용궁과 같은 이계(異界)는 오빠 내면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바른 모습의 아니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바른 모습의 아니마와의 만남은 곧 이전의 삶과의 단절이며,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이 된다.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장과정의 오빠는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아니마의 부정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색시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시야확장과 내면탐구를 통해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립적인 존재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도 자신만의 개성이 있는 존재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빠의 성장과정은 집에서 쫓겨 나기전의 모습과 집에 다녀오기를 결심하는 모습 그리고 나중에 나올 여우누이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에서 확인된다. 집에서 쫓겨나기 전 부모의 말을 듣고 마굿간이나 외양간을 지키는 오빠의 모습, 내쫓김을 당하는 모습은 분명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자신의 판단을 따르기 보다는 주어진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이며, 무기력하게 내쫓김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집에 다녀오려는 모습에서 아내와 벌이는 실랑이 과정이나 집에 돌아갔는데 자신을 위협하는 여우누이를 회피하는 장면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는 태도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오빠의 모습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믿고 의식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으로 수동적인 자세와는 다른 수용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오빠가 집으로 다녀오기를 결심하자 색시는 옛상처를 치유하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오빠만의 무기, 조력물을 주면서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때 조력물로 주는 것이 병이다. 병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태모의 자궁이며, 풍요와 자비를 나타내는 어머니의 포용의 원리를 나타내고,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모든 것을 창조해내는 마술적인 병이고, 치유의 병이고, 우주의 병이다. 즉 창조적인 모성이고 남성의 무의식적인 여성상, 아니마의 원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빠는 마음 든든한 조력물인 병을 갖고 옛 집에 간다. 옛 집에는 부모나 형제는 온데간데 없고 동네는 쑥대밭이 되었다. 정체없이 헤맸던 것이 내면 탐구를 시작해서 자아를 짓누르며 무의식속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여성성을 아는 것이었다면 옛 집에 간 것은 극대화된 부정적인 여성성과 대결을 벌이는 자아의 본격적인 싸움이다.

과거의 자아를 짓누르던 부정적인 여성성을 마주한 순간 옛 상처가 엄습해온다. 오빠는 부정적인 여성성의 위험성을 알고 옛 집에서 도망친다. 도망치는 오빠가 이전과 달라짐을 눈치 챈 여우누이는 자립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쫓아간다. 이때 오빠는 말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여성성의 그림자에서 탈피하자 오빠는 신체적인 건강을 되찾았다. 오빠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부정적인 여성성을 창조와 치유의 원형인 조력물을 이용하여 오빠의 내면으로부터 완전히 제거시키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두루 갖춘 자립적인 인격이 형성된 존재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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